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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와 펩시, 그리고 그 회사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펩시와 코카콜라의 역사

펩시의 푸른 유혹

코카콜라의 백 년 열정

세계 최초의 코카콜라 병은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인 1886년 미국에서 탄생했습니다. 이 마법의 음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전 세계 수억 명의 소비자를 사로잡으며 '세계 음료의 제왕'이 되었고, '제국에는 없는 음료'라는 명성까지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카콜라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코카콜라'의 깃발을 높이 들고 감히 도전장을 내민 또 다른 회사가 있었습니다. "고객이 가장 좋아하는 세계 최고의 기업"을 표방하며 코카콜라와의 경쟁은 점점 격화되었고, 결국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펩시입니다.

새로운 코카콜라가 오래된 코카콜라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펩시도 코카콜라가 출시된 지 12년 뒤인 1898년 미국에서 탄생했는데,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음료는 코카콜라의 극비 제조법인 코카콜라와 매우 흡사한 맛이 나 코카콜라의 도움을 받아 펩시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코카콜라가 본격적으로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65,438+00년 전으로, 이 시기에는 이미 탄산음료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정된 패턴을 만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코카콜라 하면 코카콜라를 떠올립니다. 펩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두 번이나 파산 위기에 처했지만 음료 시장은 여전히 코카콜라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929년부터 시작된 큰 위기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펩시는 주저하지 않고 코카콜라의 절반 가격인 파운드당 5센트로 가격을 인하하여 거의 모든 미국인이 "니켈로 펩시를 두 배 이상 살 수 있다"는 말을 알 정도였지만 펩시는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음료 업계에서 코카콜라와 펩시는 시장 선도자이자 시장 추종자(도전자)입니다. 시장 추종자는 시장 리더를 공격해 더 많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거나, 경쟁에 참여하되 시장 점유율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 두 가지 전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펩시코는 후자의 전략으로는 회사의 생존을 보장할 수도 없고 실현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펩시는 전자의 전략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스틸, 켄트, 캘러웨이 및 기타 '펩시 인재'들이 코카콜라에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펩시 세대

당시 펩시는 성장에 매우 유리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대공황과 전쟁의 세례를 받지 않았고, 이전 세대와는 매우 다른 자신감과 낙관적인 성향을 지녔습니다. 이 어린 아이들은 성장하여 점차 미국의 주축이 될 것입니다. 새롭고 큰 것에 대한 이들의 욕구는 펩시가 '신세대'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 캠페인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펩시가 광고 사업을 BBDO(바튼-더스틴 앤 오스본)에 넘기고 나서야 상황이 더 명확해졌습니다. 당시 코카콜라는 펩시보다 5:1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BBDO는 소비자 구성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분석하여 코카콜라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공략하고 펩시를 젊은이들을 위한 음료로 바꾸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4년간의 개발 끝에 '펩시 뉴 제너레이션'이라는 슬로건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20년 이상 사용했습니다. 10년 후 코카콜라가 펩시의 다음 세대 공략 광고에 대응하려 했을 때 이미 펩시의 우위는 2:1로 좁혀진 상태였습니다. 이때 BBDO는 펩시코의 추가 전략 개발을 지원하며 '신세대'로 널리 알려진 코카콜라에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뉴 제네레이션'이라는 슬로건은 '신세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펩시 챌린지는 알려진 대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중 두 경기는 매우 잘 치러졌습니다.

첫 번째 전투는 시음 실험과 후속 캠페인이었습니다. 65438년부터 0975년까지 펩시는 댈러스에서 시음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펩시와 코카콜라의 상표를 모두 지우고 M과 Q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결과 펩시가 코카콜라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 BBDO는 코카콜라의 충성도가 높은 고객들이 M이 새겨진 펩시를 선택한 반면 Q가 새겨진 코카콜라는 무시하는 광고를 내보냈습니다. 이 광고는 소비자들이 '오래된' 콜라에 대한 충성도를 재고하고 '새로운' 코카콜라와 비교하게 함으로써 펩시와 BBDO가 의도한 바를 정확히 달성했습니다. 코카콜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비교가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M을 선호한다고 비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펩시의 매출이 급증하고 펩시와 코카콜라의 격차는 2:3으로 좁혀졌습니다.

1983년 말에 BBDO는 5백만 달러를 들여 마이클 잭슨을 고용해 두 편의 광고를 촬영했습니다. 잭슨은 두 편의 광고를 촬영하고 잭슨 형제를 위한 광고 투어를 기획했습니다. 이 인기 록 스타는 펩시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광고가 방영된 지 한 달 만에 펩시 매출이 급증했습니다. 펩시코의 자체 통계에 따르면, 광고가 방영된 해에 미국인의 약 97%가 1인당 12번씩 이 광고를 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색상: 빨간색과 파란색

사실, 코카콜라와 펩시의 로고는 디자인과 포지셔닝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밝은 빨간색 바탕에 흰색 스펜서체 필기체로 "Coca-Cola"를 사용하여 빨간색을 선택했습니다. 흰색 글자는 빨간색 배경에 여유롭게 튀어나와 있고 필기체 글자는 일관성 있고 유려하며 미묘한 인상을 줍니다. 빨간색과 흰색의 전통적인 색상이 심플하고 우아하며 활기차게 보입니다.

펩시는 파란색을 선택했습니다. 새하얀 바탕에 중국어 번체와 유사한 파란색 글꼴 "PepsiCola"가 있습니다. 파란색 문자는 흰색 배경에서 매우 눈길을 끌며 긍정적이고 공격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파란색은 세련미, 혁신, 젊음의 상징입니다. 하이테크 산업의 선두주자인 IBM은 파란색을 회사의 메인 컬러로 선택해 '블루 자이언트'라고 불렀습니다. 펩시의 색상은 기업 이미지 및 포지셔닝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진공 지대에서 출발한 펩시는 미국 내수 시장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코카콜라에 가장 강력한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국내 시장과 마찬가지로 세계 시장에서도 펩시는 코카콜라의 오랜 지배력 때문에 설 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펩시의 전략은 코카콜라가 아직 진출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진공 상태'에 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회사의 회장인 도널드? 켄트는 철저한 조사 끝에 구소련, 중국, 아시아, 아프리카에 여전히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공백 지역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켄트의 절친한 친구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큰 도움을 주었고, 1959년 모스크바에서 미국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켄트는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닉슨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닉슨에게 "소련 지도자에게 펩시를 마시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닉슨은 흐루시초프와 대화를 나눈 후 전 세계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펩시를 손에 든 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특별한 광고였습니다. 이후 펩시는 구소련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고, 이를 계기로 펩시는 구소련 국가와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펩시는 구소련 시장에 진출했지만 구소련에 공장을 건설하고 콜라 판매를 독점하려는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75년 펩시는 구소련에 보드카 판매를 돕는 조건으로 구소련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판매를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여 미국 민간 기업 최초로 구소련 시장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즉각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모든 주요 신문이 이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보도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코카콜라가 가장 먼저 지사를 설립하며 선두에 섰습니다. 하지만 이 움직임은 아랍 국가들에서 불매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기회를 포착한 펩시는 즉시 혜택을 보지 못한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나머지 중동 시장을 단숨에 장악하여 아라비아해 주변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고 아랍어에서 펩시를 일상적인 단어로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인도 정부는 코카콜라의 포뮬러를 공개해야만 인도에서 유통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양측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코카콜라는 인도에서 철수했습니다. 펩시는 포뮬러에 대한 비밀이 없었기 때문에 식품 가공 공장을 설립하고 농산물 수출을 늘리는 대가로 이 중요한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펩시는 해외로 사업을 확장할 때 항상 닉슨을 비밀 무기로 활용했으며, 1960년대 닉슨의 비참한 패배 이후에도 여전히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켄트는 닉슨을 펩시의 컨설턴트 겸 변호사로 고용하고 연봉 6억 5,438만 달러 이상을 지급했습니다. 반면에 닉슨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펩시를 홍보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성공한 후 그는 켄트를 대통령의 경제 정책 고문으로 임명하여 경제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펩시가 세계 시장에서 코카콜라와 경쟁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코카콜라와 경쟁할 때 펩시는 정치계에 의존하여 특별한 기회를 포착하고 독특한 수단을 사용하여 코카콜라로부터 시장을 장악하는 데 매우 능숙했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다각화

음료 업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코카콜라와 펩시 모두 위험을 피하기 위해 사업 다각화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사업 다각화는 두 회사에 매우 다른 이점을 가져다주었고, 펩시는 이 경쟁에서 다시 한 번 코카콜라를 앞질렀습니다.

1970년대 이후 코카콜라는 음료와 관련이 없는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정수, 양조, 새우 양식, 과일 생산, 영화 및 TV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1982년 6월+10월에 7억 5천만 달러를 들여 콜롬비아 스튜디오를 인수하는 등 이러한 산업에서 새로운 벤처를 인수 및 설립했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투자는 자본 수익률이 1%에 불과해 회사 주주들에게 돌아간 수익은 훨씬 적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코카콜라는 본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익이 급증했습니다.

펩시는 훨씬 운이 좋았습니다. 1960년대부터 단일 사업 범주에서 벗어나 빠르게 다른 산업을 개발하여 회사를 다각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77년부터 펩시는 패스트푸드 업계에 진출하여 KFC, 피자헛 이탈리안 피자, 타코벨 멕시칸 레스토랑을 인수했습니다. 이때 펩시의 라이벌은 패스트푸드의 왕 맥도날드였습니다. KFC, 피자헛, 타코벨은 펩시에 합병되기 전에는 핫앤콜드 레스토랑에 불과했고, 각자의 좁은 시장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펩시가 이들을 합병한 직후, 펩시의 목표이자 라이벌은 "도시의 또 다른 프라이드 치킨과 파이 가게가 아니라 위대한 맥도날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펩시는 패스트푸드 업계의 강자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던 시기였고, 맥도날드의 음식 가격도 함께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펩시는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돌파구로 삼아 공격에 나섰습니다. 펩시는 비용 절감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단순화, 단순화, 단순화'라는 원칙(음식의 양과 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외 운영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을 의미함)을 개발했습니다. 예를 들어 주방 공간을 최소화하고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 일부 음식을 미리 준비해 매장 밖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었고, 빠르게 조리되는 메뉴를 전면에 배치해 회전율을 높이는 등 메뉴 구성도 변경했습니다. 그 결과 기존 직원의 절반으로 매출이 빠르게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매출의 급격한 증가, 극적인 비용 절감, 이익의 급증으로 맥도날드와 경쟁하고 펩시 음료의 판매량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펩시는 또한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가정 배달'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마케팅을 개척했습니다. 당시 펩시코의 사장인 웨인 캘러웨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쁜 사람들이 레스토랑에 오기만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번영할 수 없습니다." 당시 펩시코의 사장이었던 캘러웨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만큼이나 프라이드 치킨과 파이를 쉽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펩시는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음식과 효율적이고 다양한 서비스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해마다 기록적인 매출을 올리며 곧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레스토랑 회사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맥도날드의 연간 이익률이 8%였던 반면 펩시코의 패스트푸드 회사는 20%에 달할 정도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기존의 많은 패스트푸드 회사들이 펩시의 공격적인 공세에 밀려나고 맥도날드마저 큰 위협을 받게 됩니다.

펩시는 마침내 탄생 92주년을 맞아 경쟁사를 따라잡았고, 1990년에는 펩시의 소매 판매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두 콜라가 시장을 균등하게 양분했습니다. 그해 A.D.?c?Nielsen은 미국, 유럽, 일본의 소비자 9,000명을 대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브랜드 순위를 조사했습니다. 펩시와 코카콜라는 각각 6위와 8위를 차지하며 영예를 안았습니다. 1997년 한 해 동안 펩시코의 글로벌 매출은 292억 9,200만 달러로 포춘 500대 기업 98개 중 92위를 차지하며 음료 회사 중 세계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코카콜라는 1,886억 8,800만 달러의 매출로 201위를 기록하며 2위에 그쳤습니다.

중국에서의 코카콜라

코카콜라는 중국에 진출한 최초의 미국 기업이고 펩시코는 독보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도전자의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중국 시장에서 펩시의 경쟁 전략은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젊은 층과 스포츠 애호가 공략.1999년 3월 중국축구협회(CFA)는 CFA와 국제관리그룹(IMG)이 우호적인 협상 끝에 공식적으로 계약을 체결하여 펩시코가 향후 5년간 중국 1부 리그의 명명권을 매입한다고 발표했습니다.1999년부터 2003년까지 1부 리그의 명칭은 다음과 같이 명명됩니다. 펩시코 A-리그로 명명되었지만, 계약에 따라 경기 진행은 금지되었습니다. 상한선 철폐를 추진 중인가요? 라오스 리그의 클럽과 팀들은 중국 최대 스포츠 시장의 홍보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펩시코도 다양한 형태로 중국 스포츠에 참여하여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펩시코의 광고는 모두 패셔너블하고 트렌디하며 젊거나 스포티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베이징과 남부의 주요 대도시 및 중소도시에 집중합니다. 현재 펩시 제품은 베이징, 선전, 광저우, 푸저우, 상하이, 난창, 구이린, 청두, 충칭, 창춘 등 중국 내 12개 합작 병입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이 중 베이징과 창춘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남부 도시로 상하이, 푸저우, 청두, 충칭은 펩시의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꼽힙니다.

3. 국내 음료 회사의 인수 합병.1993년 펩시코는 광저우에 펩시 아시아 음료 유한공사를 설립하고 펩시 음료 생산을 담당하는 공장과 현지 브랜드 생산을 담당하는 공장 두 곳을 설립했으며 1994년 펩시는 티안푸 콜라 및 아틱 음료와 합의하여 충칭 펩시 티안푸 음료 유한공사 및 베이징 펩시 아틱 음료 유한공사를 설립했습니다. Ltd.

4. 다각화. 펩시코의 음료 및 케이터링 사업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중국 내 펩시코 음료에는 펩시코, 세븐 해피니스, 미닛메이드, 지랑, 아틱 오션 등이 있습니다. 중국 내 펩시의 레스토랑은 주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과 피자헛 피자입니다.

1993년 펩시가 중국 경공업연맹과 협력 및 발전 각서를 체결한 이래, 펩시는 국내 프로젝트에 7억 달러를 투자하여 12개의 합작 병입 공장과 3개의 농축액 생산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펩시코 인터내셔널은 또한 향후 5년 동안 중국에 9개의 신규 공장을 설립할 계획입니다. 현지 파트너와 협력하여 첨단 기술 및 장비를 이전하고 현대적인 관리 및 마케팅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입니다.

펩시의 공격적인 확장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1994년에만 중국 매출이 50퍼센트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콜라 시장에서 코카콜라는 여전히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65438-0998 중국 탄산음료 시장에서 상위 5개 브랜드 중 4개가 코카콜라였다.65438-0998 2월 1일부터 28일까지 상하이 인민광장에 있는 중국민생은행 건물에 총 면적 9000㎡에 달하는 대형 코카콜라 광고 4개를 게재하며 펩시코에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민 코카콜라는 엄청난 위세를 과시했다. 펩시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줍니다.

1999년 코카콜라를 출시한 와하하 그룹은 제일재경일보를 통해 전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코카콜라 점수'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베이징 통계국 전산 센터는 반환된 설문지에 대한 통계를 집계했습니다. 그 결과 설문조사에 참여한 소비자의 63%가 코카콜라를, 34%가 베리콜라를, 3%만이 펩시를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분석에 따르면 중국인은 외국 생활을 숭상하고 자국 제품을 아끼는 두 가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순수한 미국식 맛으로 '콜라'의 대명사가 되어 전자의 사고방식에 의해 만장일치로 사랑받고 있으며, 베리콜라는 후자의 사고방식으로 젊은 층을 사로잡았고, 펩시는 일반적으로 인지도가 낮아 최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신생 코카콜라조차도 펩시와 경쟁할 수 없었습니다. 펩시는 중국에서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논평

펩시와 코카콜라 간의 전쟁은 펩시가 시장에서 도전하고 경쟁하는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국 펩시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세계, 특히 세계 500대 기업으로 대표되는 다국적 대기업을 바라볼 때 우리는 중국 기업이 그들에 비해 얼마나 작은지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중국 기업들은 펩시의 정신을 배워 세계적인 기업들과 용감하게 맞서야 합니다. 사실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흥 중소기업에 비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대기업도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펩시는 코카콜라의 경영 조직 개편과 인사 분쟁이 가져온 기회를 포착하여 코카콜라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고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도 펩시의 경쟁 전략은 독특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진공 지대'를 차지할 기회를 포착하여 후발주자와 상호 피해 상황을 피하고 대규모 독과점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펩시코는 맥도날드와 다른 패스트푸드 기업에 대한 도전은 "고품질의 저렴한 제품, 효율적이고 다양한 서비스, 지속적인 혁신"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모두 고객의 심리와 니즈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코카콜라, 황펀콜라, 중화콜라가 잇달아 출시되어 콜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시 펩시의 정신, 특히 펩시의 경쟁 전략에서 배워 올바른 포지셔닝을 찾고 마케팅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콜라에는 국민 제품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외에는 창의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옐로우 핀 콜라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현재 TV에는 '불의에 맞서다'와 '드래곤 보트'라는 두 개의 옐로우 콜라 광고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전자의 내용은 어린 소년이 옐로우 콜라를 빼앗긴 후 무력감에 빠진다는 내용입니다. 이때 성룡은 매우 용감했고 콜라를 되찾았습니다. 소년은 성룡의 쿵푸에 감탄하고 노란 콜라를 버리고 한 잔 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후자는:모두가 용골을 어깨에 짊어지고 물속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은 비 오듯 땀을 흘렸습니다. 이때 옐로우 펜 콜라 한 캔이 나타났습니다. 성룡이 캔을 열고 고개를 들어 한 모금 마신 다음 "옐로우 펜 콜라, 모두 행복해"라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이전 광고가 옐로우 펜 콜라가 아니라 성룡을 위한 쿵푸 광고인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콜라를 장난감으로 바꾼다고 해서 콜라가 지닌 진정성이 전혀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옐로우 펜 콜라가 특히 땀을 많이 흘렸을 때 갈증을 해소해 주며 다른 콜라와 다르지 않다는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광고의 문제점은 위치가 좋지 않고, 깊이가 없고, 차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다른 두 콜라와 마찬가지로 황펀콜라가 제품 포지셔닝에 대한 불확실성을 드러내는 신호입니다. 외국 콜라 시대에 '중국 자체 콜라'라는 홍보는 당연히 일부 고객을 확보 할 수 있으므로 코카콜라는이를 수요로 가장 먼저 사용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소비자가 우려하는 것은 자국 제품뿐만 아니라 외국산 콜라에 비해 자국 제품의 참신함과 독창성,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좋아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물론 이는 '국민 제품'이라는 단어에만 의존한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콜라가 잘 팔린다면 와하하가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미래의 '와하하 세대'를 육성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닙니다. 현재 대만에서 청량음료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코카콜라나 펩시가 아니라 현지 음료 회사입니다. 그 비결은 독특한 시장 포지셔닝과 유통 채널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펩시에서 배워야 할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살펴보십시오. 우리 기업들은 펩시의 역량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자동차 업계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맛에서 가격, 포지셔닝에서 광고, 마케팅 캠페인에서 유명인의 지지, 기업 문화에서 포장 변경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두 거대 콜라 회사가 뿜어내는 연기는 영원할 것 같습니다. 펩시는 코카콜라가 업계 1위였던 시절에 시장에 진입하여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모방 전략이 초반에 좌절된 후 펩시는 게임 전술을 바꿔 코카콜라와 맞섰습니다. 이런 식으로 펩시는 단기간에 쉽게 왕국을 건설했고 몇 년 후 코카콜라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펩시와 코카콜라가 벌인 세기의 전쟁 뒤에는 역발상의 브랜드 성공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1라운드: 인재 기획 공모전

코카콜라가 중국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인재 발굴과 육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코카콜라의 한 리더는 "코카콜라는 인재를 선발할 때 코카콜라 브랜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업무에 전념하며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코카콜라: 9가지 자질 중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습니다.

Coca-Cola:여기에는 황금 그릇이 없다

Coca-Cola:직원은 회사의 영혼이다.

코카콜라: "우수한" 인적 자원 전략

펩시코의 성장 전략에서 '사람'은 그 중심에 있습니다. 2001년 펩시코 CEO 스티븐 레이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성장하지 않으면 회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펩시코는 인재 육성을 통해 성장 전략을 달성하고 있으며, 레이몬드의 가장 큰 업적은 인재 육성에 있습니다. 경영 인재가 부족했던 코카콜라와 같은 회사와 달리 펩시는 강력한 인재 팀을 개발했습니다.

펩시: 영웅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미국 펩시코의 채용 철학

인재 전략 관점에서 본 펩시의 코카콜라 추격 방법

2라운드: 기업 문화 경쟁

114년의 역사를 가진 코카콜라는 세계 최대의 청량음료 제조업체입니다. 코카콜라 시럽과 탄산수를 섞어 만든 음료인 코카콜라가 전 세계를 강타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코카콜라의 성공에서 현재 기업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코카콜라 포에버

펩시의 성공의 모든 단계를 살펴보면 회사의 문화와 브랜드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파산 직전의 작은 회사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기까지 펩시는 어떤 여정을 걸어왔을까요? 중국 기업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펩시코의 기업 문화 공개

3라운드: 중국에서의 전략적 대결

코카콜라 컴퍼니는 중국 진출 이후 중국 현지화 전략을 단계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역 개발, 보틀링 공장 건설, 여러 주요 파트너와의 원활한 협력, 신제품 홍보, 현지 관리자 채용, 민속 및 광고 콘텐츠의 현지화 등 모든 면에서 글로벌 브랜드 기업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코카콜라 다국적 현지화의 본질

펩시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매우 열광적이고 인기 있는 브랜드입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한 지 10년이 넘은 이 브랜드는 탁월한 운영 전략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선두에 서서 중국 시장에서 불굴의 혁신적 도전자인 펩시의 비즈니스 전략을 재조명해 봅시다. 펩시의 성공은 오늘날 중국 기업들에게 유용한 영감과 지혜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펩시: 중국 전략

& gt& gt대면 대결: 시장 경쟁

펩시는 코카콜라가 업계 1위였던 시절에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펩시는 코카콜라에 맞서 '당신은 정통과 전통의 대표주자, 나는 신세대의 선택'이라는 전략을 내세웠습니다. 펩시는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했습니다. 코카콜라는 소비자 그룹의 구분을 기반으로 코카콜라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당신은 올드, 나는 뉴, 우리는 두 개의 시장에 속하며 같은 상사,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라벨을 붙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펩시는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고, 몇 년 후 코카콜라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최우수 마케팅 사례: 코카콜라, 올림픽 우승. 코카콜라: 공격적인 마케팅 캠페인

펩시가 코카콜라를 공격하는 진짜 이유를 설명합니다.

"두 번의 코카콜라 광고 전쟁"의 용과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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